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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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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버트 보일은 1627년 아일랜드에서 태어난 과학자이다. 그는 근대 화학의 기초를 다졌으며, 기체의 부피와 압력 간의 관계를 나타내는 보일의 법칙을 발견했다. 보일은 "보이지 않는 대학"과 영국왕립학회에서 활동하며 과학 연구에 전념했고, 공기 펌프를 개량하여 공기의 성질을 연구했다. 그는 또한 리트머스 시험지를 개발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으며, 신학에도 관심을 가져 기독교를 옹호하는 강연을 기증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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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보일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요한 케르세붐, 1689년 초상화
요한 케르세붐, 1689년 초상화
존칭 접두사존경하는
이름로버트 보일
출생일1627년 1월 25일
출생지리즘어 성, 리즘어, 워터퍼드 주, 아일랜드
사망일1691년 12월 31일 (64세)
사망지런던, 잉글랜드
분야물리학, 화학
직장왕립 학회
교육이튼 칼리지
주목할 만한 학생로버트 훅
알려진 업적보일의 법칙
보일 온도
미립자설
기체 화학
인물
이름로버트 보일
이미지 크기250px
캡션로버트 보일 (1627–91)
출생일1627년 1월 25일
출생지[[파일:Royal Standard of Ireland (1542–1801).svg|border|25x20px]] 아일랜드 왕국 워터퍼드 주 리즘어
사망일1691년 12월 31일(64세)
사망지런던
분야물리학, 화학
알려진 업적보일의 법칙, 근대 화학의 창시자
영향을 준 사람갈릴레오 갈릴레이, 오토 폰 게리케, 프랜시스 베이컨
과학자 정보
이름로버트 보일
그림 크기180px
그림 설명로버트 보일
태어난 날1627년 1월 25일
태어난 곳아일랜드 먼스터 지방 리스모어성
죽은 날1691년 12월 30일(64세)
국적잉글랜드 왕국
분야화학, 물리학
소속런던 왕립 협회(Royal Society of London)
주요 업적가스의 물리적 성질 연구
화학 원소의 개념 연구
기타
FRSNA8137
FRS TitleBoyle; Robert (1627 - 1691)
FRS Accessdate2011-12-11

2. 생애

1627년 아일랜드리즈모어에서 제1대 코크 백작 리처드 보일과 캐서린 펜튼 보일의 아들로 태어났다. 8살에 어머니가 사망하자 잉글랜드의 이튼 칼리지로 보내졌으며, 아버지의 친구인 헨리 워튼이 감독관으로 있었다. 이튼 칼리지에서 3년을 보낸 뒤 프랑스인 가정교사와 함께 제네바 등지를 여행했다. 1641년 피렌체에서 겨울을 보내며 노년의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위대한 천문학자의 페러독스"를 공부하였다.[35]

1644년, 과학에 대한 강한 흥미를 가지고 잉글랜드로 돌아왔다.[64] 도싯주의 스탈브릿지 장원에 실험실을 마련하고, 영국왕립학회의 전신인 "보이지 않는 대학"의 주요 연구자로 활동했다. 이들은 런던의 그레셤 칼리지나 옥스퍼드 등에서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졌다.

1654년부터 런던에 거주했다. 1657년 오토 폰 게리케의 공기 펌프에 대한 책을 읽고 로버트 후크의 도움을 받아 더 나은 공기 펌프를 고안했다. 1659년 제작된 이 펌프는 "보일 기계" 또는 "기체 엔진"이라 불렸으며, 보일은 이를 이용해 여러 공기 실험을 진행했다. 1660년에는 〈새로운 물리-물질 실험: 공기의 탄성조작과 그 효과〉를 발표하여 자신이 발견한 기체의 법칙을 서술하였다.

1668년, 런던 팰 몰에 있는 누나 캐서린 존스의 집으로 이사했다.[35] 그녀의 집 실험실에서 실험을 계속하며 과학에 관심 있는 지식인들과 교류했다.

1669년부터 건강이 악화되어 공적인 활동을 줄였다. 1691년 12월 31일, 마비로 사망했으며, 세인트 마틴 인 더 필즈 교회 묘지에 묻혔다. 장례식 설교는 친구인 길버트 버넷 주교가 맡았다.[35]

2. 1. 초기 생애

1627년 아일랜드 리즈모어에서 코크 백작 리처드 보일과 캐서린 펜튼 보일의 아들로 태어났다. 보일은 코크 백작 1세와 캐서린 펜턴 사이에서 태어난 일곱 번째 아들이자 열네 번째 자녀였다.[35] 당시 코크 백작은 1588년 튜더 왕조의 아일랜드 식민 기간 중 잉글랜드에서 더블린에 도착하여 부동산 관리인의 보좌관으로 임명되었고, 로버트가 태어날 무렵 막대한 부와 토지를 축적했다.[7] 코크 백작부인이었던 캐서린 펜턴은 전 아일랜드 국무장관 서 제프리 펜턴과 앨리스 웨스턴의 딸이었다.[7]

어린 시절, 보일은 그의 형들과 마찬가지로 젖먹이 젖을 먹이는 여자에게 양육되었다.[8] 세 살 때 여동생 마가렛이 태어났지만, 산욕열로 어머니를 잃었다.[40][41] 보일가의 아이들은 4년 만에 아일랜드어를 충분히 이해하고 통역할 수 있게 되었다.[43]

보일은 라틴어, 그리스어, 프랑스어를 사교육으로 배우다가 여덟 살 때 어머니가 사망하자 형 프랜시스와 함께 잉글랜드의 이튼 칼리지로 유학을 갔다. 그의 아버지의 친구인 헨리 워튼 경은 당시 칼리지의 학장이었다.[35] 이튼 칼리지에서는 아버지가 가정교사 로버트 캐류(Robert Carew)를 고용하여 아들들의 교육을 맡겼지만, 보일은 가정교사의 말을 잘 듣지 않았다.[43]

이튼에서 3년 이상을 보낸 후, 로버트는 프랑스어 가정교사와 함께 해외 여행을 떠났다. 1638년 보일은 형 프랜시스와 스위스인 가정교사와 함께 그랜드 투어를 떠났고, 스위스 제네바에서 유학 중 종교적 회심을 경험했다. 1641년에는 이탈리아를 방문하여 그 해 겨울에는 피렌체에서 지내며 갈릴레오 갈릴레이에게 사사했다. 이탈리아 체류 중에는 다음 해인 1642년에 갈릴레이가 사망한 것을 나중에 자서전에서 기록했고, 이탈리아어를 습득하고 갈릴레이의 『천문학 대화』를 읽고 그의 업적을 배웠다.[46]

부모의 묘비에 있는 어린 소년의 조각상으로, 보일로 추정되며 더블린의 세인트 패트릭 대성당에 있다.

2. 2.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에서의 생활

1627년 아일랜드리즈모어에서 제1대 코크 백작 리처드 보일과 캐서린 펜튼 보일의 아들로 태어났다. 8살에 어머니가 사망하자 보일은 아버지의 친구 헨리 워튼이 감독관으로 있던 잉글랜드의 이튼 칼리지로 보내졌다.[35] 3년 후 프랑스인 가정교사와 함께 여행을 떠났으며, 2년여 간 제네바 등지에서 보냈다. 1641년 피렌체에서 겨울을 보내며 노년의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위대한 천문학자의 페러독스"를 공부하였다.[35]

장미십자회 대학의 상징적 이미지; 테오필루스 슈바이하르트의 1618년 작품인 ''Speculum sophicum Rhodo-stauroticum''의 삽화. 프랜시스 예이츠는 이것을 "보이지 않는 장미십자회 대학"으로 확인했다. 로버트 보일은 이 단체의 회원이었다.


1644년 중반, 유럽 대륙에서 과학 연구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영국으로 돌아왔다.[10] 아버지 코크 경은 전년에 사망했고, 보일에게 도싯의 스털브리지 영지와 아일랜드 리머릭주의 상당한 재산을 남겼다.[11] 1644년부터 1652년까지 스털브리지 하우스에 거주하며 실험실을 마련했다.[11] 이후 과학적 연구에 헌신했으며, "보이지 않는 대학"으로 알려진 탐구자 집단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이들은 런던, 특히 그레샴 칼리지에서 자주 만났고, 일부는 옥스퍼드에서도 회합을 가졌다.[35]

1647년부터 아일랜드 영지를 여러 차례 방문했고, 1652년 아일랜드로 이주했지만, 화학 작업 진전이 없어 좌절했다. 그는 아일랜드를 "화학적 정신이 오해받고 화학적 도구를 구할 수 없어 연금술적 사고를 하기 어려운 야만적인 나라"라고 묘사했다.[12]

옥스퍼드 올 소울스 칼리지 대사각형에 전시된 보일 가문의 문장


올 소울스 칼리지, 옥스퍼드 대학교 대사각형 주랑에는 보일 가문의 문장이 전시되어 있다. 바로 옆에는 보일의 친구 크리스토퍼 렌이 디자인한 해시계와 슈롭셔 출신 힐 가문의 문장이 있다.[13]

1654년, 연구를 더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아일랜드를 떠나 옥스퍼드로 갔다. 옥스퍼드 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 옥스퍼드 하이 스트리트(현재 셸리 기념관 위치) 벽에는 19세기 초까지 크로스 홀이 있던 자리를 표시하는 비문이 있다. 보일은 그 홀 소유주인 부유한 약제사에게 방을 임대했다.

1668년, 옥스퍼드를 떠나 런던 팰 몰에 있는 누나 캐서린 존스, 라넬라 부인의 집에 거주했다.[35] 그는 그녀의 집 실험실에서 실험했고, 과학에 관심 있는 지식인들의 살롱에 참석했다. 형제자매는 "평생 지속되는 지적인 파트너십을 유지했으며, 서로 의료 치료법을 공유하고 과학적 아이디어를 홍보하고 원고를 편집했다."[18] 동시대인들은 캐서린이 그의 작업에 미친 영향을 널리 인정했지만, 후대 역사가들은 그녀의 업적과 형제와의 관계에 대한 논의를 역사에서 삭제했다.

2. 3. 공기 연구와 실험

1657년, 오토 폰 게리케의 공기 펌프에 대한 글을 읽고 로버트 훅의 도움을 받아 개선된 구조의 펌프를 만들기 시작했다. 게리케의 공기 펌프는 크고 "여러 시간 동안 두 명의 건장한 사람의 지속적인 노동"이 필요했지만, 보일은 책상 위에서 편리하게 작동할 수 있는 펌프를 만들었다.[14] 1659년에 완성된 "보일 기계" 또는 "공기역학 엔진"으로 그는 공기의 성질에 대한 일련의 실험을 시작했고 인공 공기라는 용어를 만들었다.[3][35] 보일의 공기 펌프에 대한 연구 결과는 1660년 ''공기의 탄력과 그 효과에 관한 새로운 물리적 기계적 실험''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35]

이 책에 대한 비평가들 중에는 예수회 신부인 프랜시스 라인(1595-1675)이 있었는데, 보일은 그의 반박에 답하면서 기체의 부피가 기체의 압력에 반비례한다는 법칙을 처음 언급했다. 영어권에서는 그의 이름을 따서 보일의 법칙으로 불린다.[35] 이 가설을 처음으로 공식화한 사람은 1661년 헨리 파워였다. 보일은 1662년 파워가 쓴 논문을 참고했지만 잘못하여 리처드 타운리의 것으로 오인했다. 유럽 대륙에서는 이 가설이 때때로 에드메 마리오트에게 돌려지지만, 그는 1676년까지 발표하지 않았고 당시 보일의 연구를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15]

2. 4. 왕정복고와 왕립학회

로버트 보일은 1644년 중반 유럽 대륙에서 과학 연구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영국으로 돌아왔다.[10] 1654년, 아일랜드를 떠나 옥스퍼드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에서 존 윌킨스(John Wilkins), 존 월리스 등 과학자 그룹이 개최한 모임(『옥스퍼드 과학협회』, 『신철학』 또는 『옥스퍼드 실험철학 클럽』)에 참가했다.[52] 옥스퍼드 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 옥스퍼드 하이 스트리트(현재 셸리 기념관이 있는 곳) 벽에는 19세기 초까지 크로스 홀이 있던 자리를 표시하는 비문이 있는데, 보일은 그 홀의 소유주인 부유한 약제사로부터 방을 임대하여 과학자들의 모임 장소로 활용했다.[11]

1657년, 오토 폰 게리케의 공기 펌프에 대해 알게 된 그는 로버트 훅의 도움을 받아 공기 펌프 구조를 개선하기 시작했다.[14] 1659년 "보일 기계" 또는 "공기역학 엔진"으로 불리는 공기 펌프를 완성하고, 일련의 공기에 대한 실험을 시작했다.[3][35] 이 공기 펌프를 이용한 연구 결과는 1660년에 ''공기의 탄력과 그 효과에 관한 새로운 물리적 기계적 실험''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35]

이 책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 중에는 예수회 신부 프랜시스 라인이 있었고, 라인의 비판에 반박하는 형태로 "기체의 부피는 압력에 반비례한다"는 보일의 법칙에 처음으로 언급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법칙을 최초로 공식화한 사람은 헨리 파워(Henry Power)로 1661년의 일이다. 보일은 파워가 쓴 논문도 인용했지만, 잘못하여 저자를 리처드 타운리(Richard Towneley)라고 적었다. 유럽 대륙에서는 이 법칙을 공식화한 사람을 에드므 마리오트라고 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가 그것을 발표한 것은 1676년의 일이며, 그 시점까지는 보일의 업적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54]

1660년에 왕정 복고가 이루어졌다. 1663년, 찰스 2세의 허가를 얻어 '보이지 않는 학원'에서 런던 왕립 학회가 발족했고, 보일도 설립 회의의 일원이었다. 1680년, 보일은 왕립협회 회장으로 선출되었지만, 프로테스탄트로서의 신념에 따라 취임 선서 내용에 주저함을 느껴 회장직을 사퇴했다.[56][57]

런던 왕립 학회가 소장한 로버트 보일의 노트북 중 하나(1690-1691). 왕립 학회 기록 보관소에는 보일의 철학적, 과학적, 신학적 논문 46권과 그의 서신 7권이 있다.


보일은 "수명 연장", "비행 기술", "영구 조명"등 24가지의 "발명하고 싶은 것 목록"을 만들었다. 이 목록에 언급된 발명은 후에 거의 대부분이 실현되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58]

1668년, 보일은 옥스퍼드에서 런던으로 이사하여 누이 부부의 집에 기거했다.[59]

2. 5. 만년

1668년 보일은 옥스퍼드를 떠나 런던에서 그의 누나 캐서린 존스의 집인 팰 몰에 거주했다.[35] 그는 누나 집에 있는 실험실에서 실험했고, 과학에 관심 있는 지식인들의 살롱에 참석했다. 보일 남매는 "평생 지속되는 지적인 파트너십을 유지했으며, 서로 의료 치료법을 공유하고 서로의 과학적 아이디어를 홍보하고 서로의 원고를 편집했다."[18] 당대 사람들은 캐서린이 보일의 작업에 미친 영향을 널리 인정했지만, 후대 역사가들은 그녀의 업적과 형제와의 관계에 대한 논의를 역사에서 삭제했다.

옥스퍼드에서 보일과 후크의 실험이 이루어진 장소에 있는 플라크(플라크)


1669년, 원래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던 보일의 건강은 심각하게 악화되기 시작했고, 점차 공적인 활동에서 물러났다. 왕립학회와의 교류를 중단하고, 화요일과 금요일 오전, 수요일과 토요일 오후에는 "매우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손님을 받지 않겠다는 뜻을 알렸다. 그렇게 얻은 여유 시간에 그는 "기력을 회복하고, 논문을 정리하고", "그 분야의 학구적인 제자들에게 일종의 연금술적 유산으로 남기려고" 했던 중요한 화학 연구를 준비하고자 했지만, 그 성격에 대해서는 알리지 않았다.

1691년 보일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고,[35] 그 해 12월 31일에 사망했다.[19] 20년 이상 함께 살면서 과학 연구를 함께 해온 그의 여동생 캐서린이 사망한 지 불과 일주일 후였다. 사인은 마비였다. 그는 세인트 마틴 인 더 필즈 교회 교회 묘지에 매장되었고, 그의 친구인 길버트 버넷 주교가 장례식 설교를 했다.[35] 그의 유언장에서 보일은 일련의 강연을 기증했는데, 이는 나중에 보일 강좌로 알려지게 되었다.

3. 과학적 탐구

로버트 보일은 프랜시스 베이컨이 『노붐 오르가눔』에서 제시한 원칙을 실제로 실행에 옮긴 과학 연구자로 평가받는다. 그는 자신을 베이컨이나 다른 특정 학자의 추종자라고 여기지 않았으며, 실험을 통해 결론을 내릴 때까지 어떠한 철학 이론에도 영향을 받지 않으려 했다.[35] 원자론이나 르네 데카르트의 이론, 심지어 『노붐 오르가눔』 자체도 신중하게 참고했다. 그는 가설을 세우기보다 지식 획득 자체를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이는 당시 과학자들이 갖지 못했던 넓은 시각을 갖게 했다.

보일은 연금술사이기도 했다.[21] 금속 변환이 가능하다고 믿고 실험을 수행했으며, 1689년에는 헨리 4세가 제정한 금, 은 증식 금지법을 폐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22][35]

보일은 물리학화학 분야에서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물리학에서는 보일의 법칙 외에도 소리 전파에서 공기의 역할, 물의 팽창력, 비중, 굴절률, 결정, 전기, , 유체역학 등을 연구했다. 화학에서는 회의적인 화학자(1661)를 출판하여 당시 연금술사들의 주장을 비판하고, 화학을 물질 구성에 대한 과학으로 정의했다. 그는 원소 개념을 지지하고 혼합물화합물을 구별했으며, 물질 성분 검출 기술을 발전시켜 "분석"이라고 명명했다. 또한 연소, 호흡, 생리학 분야에서도 연구를 진행했지만, 해부는 기피했다.[35]


3. 1. 보일의 법칙

1662년, 보일은 기체 실험 결과 "기체의 양과 온도가 일정하면, 압력(P)과 부피(V)는 서로 반비례한다"는 보일의 법칙을 입증하였다.[52]

\qquad\qquad PV = k

여기서, P: 기체의 압력, V: 기체의 부피, k: 비례 상수

프랜시스 라인의 비판에 반박하는 형태로 "기체의 부피는 압력에 반비례한다"는 법칙을 처음으로 언급하게 되었다.[54]

하지만 이 법칙(가설)을 최초로 공식화한 사람은 헨리 파워(Henry Power)로 1661년의 일이다. 보일은 파워가 쓴 논문도 인용했지만, 잘못하여 저자를 리처드 타운리(Richard Towneley)라고 적었다. 유럽 대륙에서는 이 법칙을 공식화한 사람을 에드므 마리오트라고 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가 그것을 발표한 것은 1676년의 일이며, 그 시점까지는 보일의 업적을 알고 있었다고 여겨진다.[54]

3. 2. 리트머스 시험지

로버트 보일은 프랑스의 염색공들이 식물을 이용하여 염료를 만든다는 사실을 알고, 산이 식물 즙에 미치는 영향을 실험하였다. 그 결과, 보라색 식물 즙에 산을 넣으면 빨간색으로 변하고, 염기를 넣으면 청록색으로 변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프랑스의 염색공들은 이미 오래전에 보라색 식물 즙을 이용하여 빨간색이나 청록색을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었지만, 이를 산과 염기의 관점에서 설명한 것은 보일이었다.[65]

보일은 지시약으로 쓸 수 있는 여러 가지 식물들을 계속해서 찾아냈는데, 그중 리트머스이끼에서 추출한 용액에 종이를 담갔다가 말린 리트머스 시험지는 산과 염기를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으로, 오늘날까지도 널리 이용되고 있다.[65]

3. 3. 기타 연구

그는 화학을 의학에서 분리하여 하나의 독립된 학문으로 만들었다. 스콜라 학파의 자연 철학을 배척하고 실험적 사실을 중시하여, 실험을 바탕으로 하는 근대 화학의 기초를 이루었다.[35] 1662년, 온도가 같으면 기체의 체적은 압력에 반비례한다는 '보일의 법칙'을 발견하였다. 또, 소리는 공기가 없으면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도 발견하였다.[54]

그는 뉴턴·후크와 왕립 협회를 만들었으며, 그 밖에도 수은·공기의 비중 측정, 목재의 건류에서 메틸 알코올의 분리, 정성 분석의 기초 확립, 원소 개념의 도입 등 과학에 이바지한 공적이 매우 크다.[35]

보일은 연금술사였다.[21] 금속을 변질시킬 가능성을 믿었고, 그렇게 하기 위한 실험도 수행했다. 또한, 헨리 4세가 제정한 연금술로 이나 을 늘리려는 행위를 금지한 법률을 1689년에 폐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22][35] 그의 물리학에서 중요한 업적으로는 보일의 법칙 발표, 소리의 전파에 공기가 하는 역할 규명, 물이 동결할 때의 팽창력 연구, 비중굴절 연구, 결정 연구, 전기 연구, 연구, 유체역학 연구가 있다.

화학도 즐겨 연구했다. 그의 첫 저서의 제목은 ''The Sceptical Chymist''(회의적인 화학자, 1661년)인데, 그 안에서 이나 이나 수은이 진정한 이치라고 보여주려는 사이비 연금술사의 실험을 비판하고 있다. 그에게 화학은 연금술사나 의사의 기술에 대한 단순한 부가물이 아니라, 물질의 구성을 탐구하는 과학이었다.[35] 그는 물질의 기본 구성 요소로 원소의 존재를 인정하고, 혼합물화합물을 구별했다. 물질의 성분을 검출하는 기술에 대한 여러 가지 발전을 가져왔고, 그러한 과정을 "analysis"(분석)라고 명명했다. 또한 그는 원소가 다양한 미립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을 확인하는 기술은 당시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연소호흡을 화학적으로 연구하고, 생리학적 실험도 했지만, 온화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해부에는 이르지 못했다.[35]

4. 신학적 관심

보일은 철학 외에도 신학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으며, 논쟁적인 문제에는 무관심한 채 실용적인 면에 뚜렷한 관심을 보였다. 1660년 스튜어트 왕정 복고 시대 찰스 2세의 즉위 이후, 궁정에서 호의적인 대우를 받았다. 1665년에는 성직 서임에 동의했더라면 이튼 칼리지 학장직을 받을 수 있었으나, 종교적 주제에 대한 그의 저술이 유료 성직자보다 평신도로부터 나올 때 더 큰 영향력을 가질 것이라는 이유로 이를 거절했다.[35]

보일은 자연철학이 신의 존재에 대한 강력한 증거를 제공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자신의 과학적 관심사를 신학에 통합했다. 예를 들어, ''자연 사물의 궁극적인 원인에 대한 논문(Disquisition about the Final Causes of Natural Things)''(1688)에서 그는 자연 연구가 신에 대해 많은 것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한 르네 데카르트와 같은 당대 철학자들을 비판했다. 대신 보일은 자연철학자들이 자연의 일부분에 보이는 설계를 사용하여 신이 세상에 개입했음을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자신의 과학적 실천에서 파생된 방법을 사용하여 복잡한 신학적 질문을 해결하려고 시도했다. ''부활의 가능성에 대한 일부 물리-신학적 고찰(Some Physico-Theological Considerations about the Possibility of the Resurrection)''(1675)에서 그는 원래 상태로의 환원으로 알려진 화학 실험을 사용하여 육체 부활의 물리적 가능성을 증명하려고 시도했다. 보일은 자신의 경력 전반에 걸쳐 과학이 기독교를 지지할 수 있음을 보여주려고 노력했다.[23]

영국 동인도 회사의 이사였던[24] 그는 동쪽에서 기독교의 확산을 촉진하기 위해 많은 돈을 사용했고, 선교 단체와 성경이나 그 일부를 여러 언어로 번역하는 비용에 관대하게 기부했다.[35] 보일은 성경이 사람들의 토착어로 이용 가능해야 한다는 정책을 지지했다. 아일랜드어로 된 신약 성경은 1602년에 출판되었지만 보일의 성인기에 드물었다. 1680~85년 보일은 구약과 신약 성경을 아일랜드어로 인쇄하는 것을 개인적으로 자금 조달했다.[25] 이런 점에서 보일의 아일랜드어에 대한 태도는 당시 아일랜드의 프로테스탄트 지배층 계급과 달랐는데, 이 계급은 일반적으로 아일랜드어에 적대적이었고 아일랜드어의 사용(종교 예배의 언어로서뿐만 아니라)에 크게 반대했다.[26]

보일은 인종 기원에 대한 일원론적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인종을 연구하는 선구자였으며, 신체적 차이가 아무리 다양하더라도 모든 인간은 같은 근원, 즉 아담과 이브에서 비롯되었다고 믿었다. 그는 부모가 다른 색깔의 알비노를 낳았다는 보고된 이야기를 연구했고, 따라서 아담과 이브는 원래 백인이었고 코카소이드는 다른 색깔의 인종을 낳을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로버트 훅아이작 뉴턴의 색과 빛에 대한 이론을 물리학에서 광학 투영을 통해 다원 발생설 논의로 확장했으며,[27] 어쩌면 이러한 차이는 "정액(seminal)적 인상"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이를 고려할 때, 그는 피부색이 실제로 정액에 들어있는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현재 시점에서 당시 그의 설명이 훌륭한 설명이라고 여겨질 수 있다. 보일의 저술에는 당시 "유럽인의 눈"에는 아름다움이 피부색이 아니라 "키, 신체 부위의 아름다운 대칭, 그리고 얼굴의 좋은 특징"으로 측정되었다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28] 과학계의 여러 구성원은 그의 견해를 거부하고 "불안정한" 또는 "재미있는" 것으로 묘사했다.[29]

보일은 자신의 유언장에서 그가 "악명 높은 불신자, 즉 무신론, 자연신론, 이교도, 유대인, 무슬림"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에 맞서 기독교를 옹호하기 위한 일련의 강연(보일 강좌)에 자금을 제공했으며, 기독교인들 사이의 논쟁은 언급해서는 안 된다는 조항을 포함했다.[30][35]

5. 주요 업적

로버트 보일은 화학을 의학에서 분리하여 독립적인 학문으로 만들었다. 스콜라 학파의 자연 철학을 배척하고 실험적 사실을 중시하여, 실험을 바탕으로 하는 근대 화학의 기초를 세웠다.[31]

1662년, 온도가 같으면 기체의 부피는 압력에 반비례한다는 '보일의 법칙'을 발견하였다. 또, 소리는 공기가 없으면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도 발견하였다.

그는 뉴턴, 후크와 함께 왕립 학회를 만들었으며, 그 밖에도 수은·공기의 비중 측정, 목재의 건류에서 메틸 알코올의 분리, 정성 분석의 기초 확립, 원소 개념의 도입 등 과학에 크게 기여하였다.

2014년 로버트 보일 분석 과학상 메달


아일랜드 워터포드 주 리스모어에 있는 보일 동상


왕립 학회의 창립 멤버로서 그는 1663년 왕립 학회 회원(FRS)으로 선출되었다.[31] 보일의 법칙은 그의 업적을 기념하여 이름이 붙여졌다. 왕립 화학 학회는 그의 업적을 기념하여 로버트 보일 분석 과학상을 수여한다. 1899년에 시작된 아일랜드 과학 우수성 보일 메달은 더블린 왕립 학회와 아일랜드 타임스가 공동으로 수여한다.[32] 2012년에 시작된 워터포드 공과대학교가 리스모어 성의 지원을 받아 주최하는 로버트 보일 여름학교는 매년 로버트 보일의 유산을 기리기 위해 개최된다.[33]

온도가 일정할 경우, 기체의 부피는 압력에 반비례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법칙은 보일의 법칙으로 불린다. 후에 자크 샤를이 이 법칙을 온도 변화가 발생한 경우에 대해 일반화한 보일-샤를의 법칙을 발견했다.

오토 폰 게리케가 발명한 진공 펌프를 개량했다. 후에 니콜라 루이 드 라카유가 이러한 진공 펌프의 발명과 개량을 기념하여 펌프자리를 설정했다.

1661년, 다양한 화학 반응이 미세한 입자의 운동에 의해 일어난다고 하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설(공기, 물, 흙, 불)보다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6. 저서

로버트 보일의 주요 저서는 다음과 같다.


  • 1660 – 《공기의 탄성과 그 효과에 관한 새로운 물리역학적 실험》(New Experiments Physico-Mechanical: Touching the Spring of the Air and their Effects)
  • 1661 – 《회의적인 화학자》(The Sceptical Chymist)

《회의적인 화학자》(1661) 표지

  • 1662 – 《프란체스쿠스 리누스와 토마스 홉스의 반론에 대한 저자의 실험 설명에 대한 방어가 추가됨》(Whereunto is Added a Defence of the Authors Explication of the Experiments, Against the Obiections of Franciscus Linus and Thomas Hobbes) (《새로운 물리역학적 실험》 제2판 부록)
  • 1663 – 《실험적 자연철학의 유용성에 대한 고찰》(Considerations touching the Usefulness of Experimental Natural Philosophy) (1671년 제2부 출간)
  • 1664 – 《색깔에 관한 실험과 고찰, 어둠 속에서 빛나는 다이아몬드에 대한 관찰을 곁들여》(Experiments and Considerations Touching Colours, with Observations on a Diamond that Shines in the Dark)
  • 1665 – 《냉기에 대한 새로운 실험과 관찰》(New Experiments and Observations upon Cold)

《냉기에 대한 새로운 실험과 관찰》(1665) 표지

  • 1666 – 《정수압적 역설》(Hydrostatical Paradoxes)[36]
  • 1666 – 《입자 철학에 따른 형태와 질의 기원》(Origin of Forms and Qualities according to the Corpuscular Philosophy) (살무사를 진공에 놓는 실험을 통해 감압병을 최초로 기록[37])
  • 1669 – 《공기의 탄성과 무게, 그리고 그 효과에 관한 새로운 물리역학적 실험의 계속》(A Continuation of New Experiments Physico-mechanical, Touching the Spring and Weight of the Air, and Their Effects)
  • 1670 – 《만물의 우주적 속성, 지하 및 해저 지역의 온도, 바다 밑바닥 등에 관한 논문. 특수 속성의 역사에 대한 서론을 곁들여》(Tracts about the Cosmical Qualities of Things, the Temperature of the Subterraneal and Submarine Regions, the Bottom of the Sea, &tc. with an Introduction to the History of Particular Qualities)
  • 1672 – 《보석의 기원과 효능》(Origin and Virtues of Gems)
  • 1673 – 《기체의 이상한 미묘함, 엄청난 효능, 결정적인 본질에 관한 에세이》(Essays of the Strange Subtilty, Great Efficacy, Determinate Nature of Effluviums)
  • 1674 – 《바다의 염분, 공기의 숨겨진 실체에 대한 의혹, 냉기, 천체 자석에 관한 논문 두 권》(Two volumes of tracts on the Saltiness of the Sea, Suspicions about the Hidden Realities of the Air, Cold, Celestial Magnets)
  • 1674 – 《홉스 씨의 진공에 관한 문제에 대한 비판》(Animadversions upon Mr. Hobbes's Problemata de Vacuo)
  • 1676 – 《전기에 대한 몇 가지 주석을 포함한 특정 속성의 기계적 기원 또는 생성에 관한 실험과 메모》(Experiments and Notes about the Mechanical Origin or Production of Particular Qualities, including some notes on electricity and magnetism)
  • 1678 – 《선행 조명 없이 빛나는 인공 물질에 대한 관찰》(Observations upon an artificial Substance that Shines without any Preceding Illustration)
  • 1680 – 《대기의 야광충》(The Aerial Noctiluca)
  • 1682 – 《얼음 야광충에 대한 새로운 실험과 관찰 (공기에 대한 그의 연구의 추가 연속)》(New Experiments and Observations upon the Icy Noctiluca)
  • 1684 – 《인간 혈액의 자연사를 위한 회고록》(Memoirs for the Natural History of the Human Blood)
  • 1685 – 《광천수의 자연 실험 역사를 위한 간략한 회고록》(Short Memoirs for the Natural Experimental History of Mineral Waters)
  • 1686 – 《자연에 대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개념에 대한 자유로운 조사》(A Free Enquiry into the Vulgarly Received Notion of Nature)
  • 1690 – 《정수압 의학》(Medicina Hydrostatica)
  • 1691 – 《물리적 실험과 관찰》(Experimenta et Observationes Physicae)


보일의 종교 및 철학 저술은 다음과 같다.

  • 1648년 (1659년 출판) –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대한 몇 가지 동기와 자극제》(Some Motives and Incentives to the Love of God) (《세라픽 사랑》(Seraphic Love)으로도 알려짐)
  • 1663 – 《성경의 문체에 대한 몇 가지 고찰》(Some Considerations Touching the Style of the H[''oly''] Scriptures)
  • 1664 – 《자연철학과 비교한 신학의 우수성》(Excellence of Theology compared with Natural Philosophy)
  • 1665 – 《여러 주제에 대한 우연한 반성》(Occasional Reflections upon Several Subjects) (스위프트와 버틀러에게 조롱당함)
  • 1675 – 《이성과 종교의 조화에 대한 몇 가지 고찰, 부활의 가능성에 대한 논의와 함께》(Some Considerations about the Reconcileableness of Reason and Religion, with a Discourse about the Possibility of the Resurrection)
  • 1687 – 《테오도라와 디디무스의 순교》(
  • 1690 – 《그리스도교의 덕행가》(The Christian Virtuoso)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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